한국바행역사 와 신용욱 비행사 (Korean version)

한국 비행 역사: 그 역사 자체인 한국민간항공 개척자 신용욱 비행사의 일대기를 통해 짚어본다

신용욱 – 한국의 첫번째 민간항공사 “대한국민항공사” 설립자.

1.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 소년들 

1903년 12월 17일 미국 오하이오 (Ohio) 주에 사는 라이트 형제가 마침내 키티 홐 (Kitty Hawk)으로 노스 캐로라이나 (North Carolina) 주 해안 모래밭에서 12초, 37미터 비행에 성공한다.  이 작은 성공이 인간의 창공을 나는 꿈을 성취하게 했으며 지구를 하나의 촌으로 만들고 우주로 나가는 위대한 첫 발자국이 되었다. 자전거 포를 운영하던 오빌 (Orville) 과 윌버 (Wilbur) 형제는 인류사에 새로운 과학, 기술의 발전과 새로운 꿈을 그 다음 소년들이 갖게 했다. 

인류역사는 지상에서 바다로, 하늘로, 우주로 날아왔다. 60여년 후 미국은 아폴로 (Apollo) 발사 성공으로 달 표면에 첫 발자국을 디디게 되었고, 그 후 미 우주항공국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은 끝없이 보이에저 (Voyager) 를 띄우고 있다. 

2. 조선의 아이들도 하늘을 나는 꿈을 꾸고 있었다 

휘문중학을 다니던 안창남이 일본 오구리 비행학교로 가 조선 최초의 하늘을 나는 비행사가 된다. 그 뒤에 장덕창, 그리고 첫 여류비행사가 된 박경원…. 이 오구리 비행학교에서 비행사가 되는 교육 훈련을 받는다. 

한국 민간항공의 개척자 신용욱도 그 당시 휘문중학 졸업 후 오구리 비행학교를 마치고 도아 비행학교로 전학, 조선 최초의 1등 비행사, 1등 조종사가 된다. 그리고 그는 개인 재산으로 최신형 목조 비행기(아브로식 제 504호 K형 타이거호)를 구입 하여 조선인으로 처음으로 자기 비행기를 갖게 되고 이 비행기로 1927년 12월14일 도쿄에서 현해탄을 건너 울산에서 기름을 넣고 조선의 하늘을 나르며 여의도에 성공적으로 착륙 한다. 

신용욱 비행사는 여의도에 착륙 후 환영답사를 조선인을 위해 우리 조선말로 했다. 일제시대에  주시 될 수 있는 항일 행위였다. 환영답사 후 신용욱은 곧 그 비행기에 취재하는 동아일보 여기자를 태우고 먼저 창덕궁으로 날아 조선 임금님께 예의를 표하고 한양의 하늘을 17분간 날랐다. 군중이 용산 비행장 (현재 육군본부 자리)에 모여 이륙, 비행, 착륙 과정을 눈 여겨 본다. 사람이 하늘을 나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조선 사람들에게 비행은 아직 경이로움이었다. 이렇게 조선의 비행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 했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

 

2.1. 조선비행학교 설립 (1930년): 

같은 시기에 일본인 나시오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항공연구소를 설립하고 1927년 조선 내 항공사업에 손을 대며 조선총독부 의뢰 하에 시험비행을 하고 있었다. 신용욱은 조선인의 항공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인에게 쉽게 허락하지 않는 역경 속에서 1930년 여의도에 조선인을 위해 조선비행학교를 설립하였다. 

자신의 개인재산을 들여 조선비행학교 교사를 짖고 미국으로부터 비행기 한대를 들여와 개교 했다. 그 후 힘든 학교 운영자금을 위해 택시회사, 자전거 상점도 운영했다. 또한 유람관광 비행도 하였다. 경성상공 한 바퀴에 5원, 인천 왕복 비행에 10원을 받았다. 당시 쌀 한 가마에 13원이었으므로 탑승료는 비싼 편이었으나 그 당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랐다는 것은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심리적 가치를 갖고 있었다.

하늘을 나르는 유년의 꿈을 갖은 신용욱은 1933년 자신의 결혼식도 자기의 비행기 속에서 한다.

1934년 7월 21일 영호남지역의 폭우 수해지역 조선일보 항공취재 비행 조종사의 임무를 맞게 된다. 조선 언론사상 최초인 이 항공취재는 당시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취재용 비행기는 조선일보가 일본으로부터 대절한 프랑스 제 살무손 2A2형 이었다. 신용욱이 조종하는 살무손에 탄 신문사 촬영 반은 수재현장상황을 공중에서 영사기로 담아 기록영화 형태로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주었다. 

그 비행기는 취재뿐만 아니라 수재로 고립된 이재민들의 구호활동도 하고 구호품을 공중에서 투하도 했다. 그 후 신용욱 비행사는 우리 역사상 최초로 이루어진 항공취재에 대한 소감을 기록에 남겼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대구, 영천, 경주, 경주, 포항, 울산 등 장거리 오지에 신문항공우송도 해주었다. 

 

2.2. 조선항공사업주식회사 설립 (1936년)

일본인 나시오의 조선항공연구소에 맞서며 1936년 신용욱은 조선항공사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경성~이리간에 주2회 정기운항을 시작했고 곧 광주까지 연장운행을 했다. 이 조선항공사업사가 한국의 민간항공운송사업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 후 청진, 함흥, 혜산진, 신의주 공항을 만들고 항로를 개척한다. 주로 우편물, 화물을 운송한다. 그 당시 비행장은 잔디밭이었으며 풍향을 알리는 간단한 바람개비가 설치되었고 정비사가 몇 명 일하고 있는 정도였다. 

 

그는 비행기를 다양한 용도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 신용욱은 동해안, 서해안 바다를 나르며 나시오가 시작한 항공 어군탐지 비행도 했다. 청진, 원산, 울산 정어리 떼가 어디로 이동하고 있는가를 저공으로 비행하여 어부들에게 알려주면 어부들은 대 박을 만나고 감사해 했다. 오징어 잡이도 도왔고 조기잡이도 도왔다. 나시오는 일본사람을 위해 신용욱은 조선인 어부를 위해 일했다. 또한 신용욱은 자신의 고향인 전라북도 고창 농민을 위해 저공비행을 하며 농약을 뿌려 주기도 했다.  

그 후 조선항공사업주식회사는 일본의 만주침공, 태평양전쟁 발발로 비행사가 징집되고 비행기는 전쟁군수물자로 동원된다. 또한 1944년 일본해군의 지시로 신용욱은 비행기기, 글라이더 등 제작을 위한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되어 그 과정에서 300여명의 조선인 기술자를 채용하여 일본군에 징집을 면하게 하였다. 

 

3. 해방 과 대한국민항공사 Korean National Airlines (KNA)

 

3.1. 대한국민항공사 설립 (1948년).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 조선은 해방되었다. 미 군정 3년 후 대한민국 정부가 1948년 8월15일 새로 수립되고 초대 이승만 대통령 정부가 들어선다. 미군정 시 한국 과도기정부에 의해 신용욱은 당시 많은 저명인사들이 겪은 것과 같이 일본시대에 친일을 하였다는 명목으로 투옥 된다. 그는 4개월의 감옥생활 후 무죄를 선고 받고 나오게 된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마자 신용욱은 정부 관련부처를 통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 대통령께 독립국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항공사 하나는 있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 후 항공사의 필요성에 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지지를 받게 되고 신용욱은 개인재산을 담보로 당시의 신탁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아 1948년 미국으로부터 5인승 스틴손 경비행기 3대를 구입한다. 

그리고, 그는 이 당시 1948년 10월1일 현 서울 종로 일 번지에 사옥을 마련하고 후일 KNA (Korean National Airlines) 라고 알려진 한국 최초의 항공사인 대한국민항공사를 설립 하였다..

구입한 비행기는 선편으로 그 해9월에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신용욱 및 그의 대한국민항공사 비행사들은 부산 제3부두 저탄장의 해안도로에 내려진 3대의 스틴손 비행기를 조립하여 짧은 400미터 해안도로를 활주로로 하여 아슬아슬하게 이륙하여 처음으로 한국회사 소유의 비행기가 독립 대한민국 영토의 하늘을 날아 김해 비행장으로 갔다. 그 당시 그 감격과 가쁨은 지금도 표현하기 어렵다고 살아 있는 분들 말한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그 당시 신용욱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래,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이 나라에도 큰 비행기를 만들어 띄울 때가 오겠지”

그 후 모든 시험비행을 마치고 예정 데로 1948년 10월30일 10시 정각 한국 항공사의 첫 번 승객운송비행으로 스틴손 비행기에 승객 2명을 태우고 김포공항을 떠나 정오경 부산 김해 비행장에 착륙함으로써 독립 대한민국 민간항공 승객운송 사업의 대 막이 올랐다. 후일 1981년 이날이 한국의 “항공의 날”로 제정된다. 제1회 항공의 날인1981년 10월30일을 기념하여 기념 우표가 나오고 신용욱 사장 비행사에게 대통령 훈장이 추서된다.

 

신용욱은 이승만 대통령의 제안으로 1950년도 자신의 고향 전라북도 고창 국회의원 선거에 뛰어 들게 되고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이 된다. 그리고 제3대 국회의원까지 했다. 그는 그 전에 비행기로 농약을 뿌리든 식으로 그의 스틴손 비행기로 “떳다 봐라 산용욱” 의 유세 물을 고창 선거구에 저공비행으로 뿌렸다. 한국 최초의 비행 선거판촉 방법이었고 그의 비행기 사용에 대한 또 하나의 창의성은 보여 주는 대목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정치 관련은 처음에는 타의에 끌려 국회의원이 되었지만 당시 한국 사회 정치 상황으로는 그가 국회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자신의 대한국민항공회사 KNA는 물론 한국 초창기 민간 항공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3.2. 한국동란 위기를 항공발전의 기회로

한국 민간항공의 성장과정은 쉽지 않았다. 초창기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1950년 6월25일에 한국동란을 맞이할 줄이야!! 김일성 공산당의 남침으로 불행하게 전쟁을 맞게 된다. 6.25 전쟁이 나자마자 곧 대한국민항공사의 스틴손 비행기 3대중 2대는 군 비행기로 징집되고 피난으로 부산에 타고 내려간 남 어지 한대도 군에 징집되어 신용욱에게는 아무것도 님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희망과 함께 1952년 봄 부산 광복동 뒷골목에 조그만 사무실 하나를 얻어 대한국민항공사, 영어이름 Korean National Airlines (KNA) 이라는 간판을 걸고 비행사업을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영어 이름 KNA의 시작이었다.

먼저 신용욱은 대만의 CAT로부터 다그라스 DC-3 여객기 2대를 세 내어 갖고 와서 수영 비행장을 기지로 하여 비행시간 20분도 안 되는 떴다 하면 내려야 하는 부산-대구간을 나르며 비행사업을 다시 시작 했고, 하나씩 부산-광주, 부산-서울로 확장했다. 

그리고 미국 극동사령부와 교섭하여 CAT의 일본 국내 착륙 권을 활용하여 부산-동경간의 국제선을 개설 재일교포의 모국방문의 기회를 열고 UN군 기자단 수송도 하며 KNA 는 활발히 번창하기 시작했다. 

KNA의 초기에는 비행기 몸체에 KOREANAIR라고 표시하고 비행기 꼬리부분에는 태극기 마크와 KNA 라는 표시를 하고 날랐다. 당시 전송에 쓰는 Cable 주소도 ‘KOREANAIR” 였었다. 현 대한항공의 Korean Air라는 브랜드 이름을 당시 신용욱은 이미 쓰고 있었다. 그 후 KNA의 번영기에 비행기 몸체 위의 글을 Korean National Airlines 로 변경하였다.     

 

 

3.3. 동란의 폐허에서 일어나 KNA의 번창기로

KNA의 큰 계기는 1953년 정부로부터 1백만 달러를 빌릴 수 있게 된 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로 극동해운 남궁련, 박림방직 백낙승, 대한국민항공(KNA) 신용욱이   한국은행으로부터 각각 백만 불씩 융자를 받게 된다. 그 명분은 나라에는 배가 있어야 하고 비행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박림방직의 백낙승에 간 백만 불에 대하여 그 당시 말이 많았었다. 비행기 값이 비싼 관계로 신용욱에 간 자금에 대하여서는 큰 문제가 없었다.

KNA는 그 백만 불로 여객기 두 대 DC-3, DC-4 와 한국 최초의 헬리콥터를 미국으로부터 사온다.  DC-3로는 국내선, DC-4는 국제선을 나르는 계획하에, DC-3는 서울과 부산 및 기타 국내 도시를 나르고 DC-4는 서울과 홍콩, 서울과 미국간의 전세 운항 기로 활용된다. 또한 신용욱 비행사는 구입되는 헬리콥터 조정을 위해 스스로 미국으로 유학해 1953년 힐러 (Hiller) 헬리콥터 학교 조종 과를 졸업하여 당시 유일한 동양인 헬리콥터 조종사가 된다. 

이렇게 KNA의 번영의 시기였고 또한 수난의 시기였던1950년대는 시작되었다. 

신용욱의 비행사업은 남한의 큰 도시를 모두 연결하고 서울-제주로선 도 개발한다. 1955년부터는 부정기적 운항이지만 한국-미국간의 비행도 성취해 가난한 한국 유학생들과 전쟁 고아들이 미국으로 입양 시 미국 행 비행을 도왔다.  

국제선 공항으로 신용욱은 김포를 개발한다. 일제시대 여의도는 민간항공의 개념으로 사용 됐고 김포는 군 비행장이었다. 해방 후 6.25 한국동란을 겪으며 김포는 미군의 공항으로 쓰였다. 그러나 한국이 국제선을 유치함으로 김포가 필요했다. 1957년에 국무회의는 김포를 “국제공항”으로 지정하고 1958년에 대통령령으로 국제공항으로 설치되고 3년 후 한국정부 관할로 돌아온다.   

또한 신용욱은 세계 여러 나라에 한국 대리점 업무를 시작하고. 이를 통해 한국이 관광의 나라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며 세계화를 꿈 꾸었다. 그는 당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가 되지 않아 일본 운행은 열지 못해 서울-동경 노선을 날지 못하고, 대만. 홍콩만 운행하게 된 것을 많이 아쉽게 생각하였다. 

1950 년대, 신용욱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대한국민항공 KNA를 국제화 시대에 올려 놓았다. 그 당시 KNA가 연결한 몇 나라 항공사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 Air France 
  • Canadian Pacific Airlines
  • South Africa Airways
  • Trans Australian Airlines
  • Uraba Madeline and Central Airways
  • Paneo de Brazil
  • Pan America World Airways
  • Philippine Airlines
  • Scandinavian Airlines System
  • Middle East Airlines System
  • Civil Air Transport
  • Cathay Pacific Airways
  • British Overseas Airways  

이러한 국제화 더불어 KNA는 번창 했다. 1950 년대 KNA 스튜어디스는 한국 젊은 여자들의 선망의 직업 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미스코리아로 뽑힌 여자들이 당시 멋진 태극기 날개의 뺏지를 단 최고급 스타일의 유니폼을 입고 KNA 스튜어디스로 일을 하였다. 스튜어디스 시험은 27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신용욱 사장은 KNA 마크가 들어 있는 가방을 디자인해서 탑승자에게 선물했고, 여름철에는 한지 부채에 KNA의 상징을 그려 넣어 선물도 했다.   

 

3.4. 한미항공협정을 채결하다 (1957년)

신용욱의 큰 업적의 하나는 1957년 국회의원으로서 미국에 가서3개월간의 협상 끝에 그가 오랫동안 성취하려고 노력했던 한미항공협정을 맺은 것이다. 

그가 한국 국회 에서 “항공주권” 이란 말을 처음 쓰며 “이제 우리는 주권국가가 안이요? 미국과 정식으로 항공협정을 맺어야 합니다” 라고 역설했고 국회는 신용욱의원의 한미항공협정 추진제안을 만장일치로 받아 드리고 이승만 대통령도 이에 따라 미국과의 협상추진을 적극지지하고 신용욱 의원을 미국에 파견 하였다. 신용욱은 미국비행기가 서울의 항공을 자유롭게 나르면 한국비행기도 미국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야 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전개한 것이었다. 

협상의 결과는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한국이 원하였던 서울-하와이-로스안젤레스 항로 대신   서울-씨애틀 간의 항로를 열어주었으므로 아주 만족스런 결과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러나 1950년대의 한국상황으로 볼 때 획기적인 성취였고 더 의미 있는 것은 향후 점차적인 미국 내 항공로선 확보의 초석을 깔았다는 것이었다. 

그 협정 후 KNA는 Lockhead 649형 슈퍼 콘스텔레이션을 월부로 사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비행기가 미국까지의 전세비행기로 밖에 사용되지 못했다. 문제는 당시 한국에 미국에 여행을 할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정기여객 운항은 1960년대 중반까지 가능하지 않았다. 

결국 신용욱 비행사는 시대를 앞질러 살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는 사업자체 보다 항공에 대한 꿈을 갖고 사업을 했다. 그 옛날1950년대 평균 국민소득이 100달러가 아직 안되던 가난한 나라에서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비싸고 힘든 초창기 항공사 운영을 생각할 때 그가 민간항공 발전을 위해 이룩한 모든 것은 오직 신용욱 같이 비행의 꿈만 꾸는 비행의 개척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가 한다. 

 

3.5. 헬리콥터로 농약 살포하던 1950년대

KNA ”전성기” 신용욱 비행사는 사비로 그의 고향이며 선거구인 고창에 많은 자선을 베풀었다. 가난한 학생들의 장학금 마련, 6.25전쟁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 지원, 또한 교육사업 지원을 위하여 학교를 세웠고 고창에 고등공민학교도 세웠다. 

여름에는 고창 및 인접 지역 논에 일제시대 조선항공사업 운영 시 자신의 경비행기로 저공하며 고창 농민을 위해 농약을 뿌렸던 식으로, 이번에는 그가 사들인 그가 좋아하는 헬리콥터를 사용해 농약을 공중 살포해 해충으로부터 수확을 보호했으며 당시 농민들은 매우 감사해 했다. 

아깝게도 1958년 8월 농약을 뿌리다 헬리콥터 프로펠라가 전기 줄에 부디 쳐 추락하여 그것이 그의 헬리콥터 농약 살포의 마지막이 되었지만 지금도 그 당시 사람들은 그를 농약 뿌리는 일군 국회의원이라고 기억하며 그를 존경하는 잘아는 사람으로 생각하며 꼭 신용욱씨라고 부른다. 

신용욱은 헬리콥터 추락 후 6년간의 연구로 세계최초로 헬리콥터 추락방지장지 와 속력증가 장치를 발명하여 이를 상공부특허국 및 자유세계 13개국에 특허신청을 하였다. 이러한 신용욱의 비행에 대한 열정은 그 당시 조그만 나라 한국의 비행에 대한 국제적 위상을 올려 주었다.  

그가 고창 지역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 농약 살포보다 농민을 위해 농림부를 설득하고 사비로 충당하며 고창지역에 커다란 신림저수지. 중앙저수지를 포함한 4개의 저수지를 만든 것이었다. 그가 당시 정부 해당 장관들로부터 항공개척에 이바지한 공로로 받은 감사장 과 농약살포와 저수지 구축 등 농업정책실천에 기여한 공로로 받은 감사장은 당시 신용욱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특히 그 후 고창 농민들이 신용욱씨에 대한 감사를 기리 세기기 위해 신림저수지와 중앙저수지에 각각 세워준 2개의 공덕비는 지금 보면 더 더욱 의미가 있다.     

지역 주민들이 세운 신용욱 비행사의 중앙 저수지 공덕비 (그의 3 딸) 와 신림 저수지 공덕비    

 

4. 분단된 나라의 비극, KNA 창랑호 납북 (1958년), KNA 쇠퇴의 시작 

신용욱은 6.25 한국동란의 시련을 극복하고 일어나 대한국민항공사 KNA를 일으켰다. 많은 개척자가 당하는 것과 같이 신용욱은 또 하나의 큰 시련을 겪는다. 1957년 7월7일 부산 수영 비행장에 착륙하던 DC-3가 돌풍을 만나 다행이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비행기는 대파된다. 신용욱과 KNA 항공역사에 첫 번째 사고였다. 

신용욱은 부산의 기류가 불안정한 것을 조종사에게 설명하고 바람을 피하고 바다를 옆으로 하고 착륙하라고 여러 번 지시했었다. 그러나 그 지시를 잊고 미국인 조종사가 바다를 향해 착륙 하려다 예기치 않은 돌풍을 만나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그 조종사는 그 당시에 한국인 조종사는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서 영국 로이드 보험회사에서 외국인 조종사를 고용하도록 해서 채용된 미국인 이었으나 파면 시켰다. 외국인 조종사를 이용 해야 한다는 자체가 또한 그 당시   한국에서 항공사업을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하여간 부산 DC-3 사건은 서울과 부산의 일 간지에 그런 사고는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크게 계제하고 겨우 무마했다. 그러나 KNA에게는 더 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수영장 착륙사건 몇 달 후 비행기 한 대 DC-3 “창랑호”가 북한 간첩의 음모로 북한으로 납북된다. 상상할 수 없던 사건이었다. 1958년 2월 16일 부산을 출발한 비행기는 서울 공항에 도착하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추적 결과 북한으로 납북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DC-3대파사건은 신문 사과로 무마 되었지만, 창랑호 납북사건은 사과나 어떤 재 발생 방지 조치로 무마 될 성질의 사고 아니었다. 

“창랑호 납북”은 한국을 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신용욱과 KNA를 흔들어 놓았다. UN을 흔들어 놓았다. 또한 미국인 조종사 와 서독 비즈니스 탑승객 때문에 미국과 서독을 흔들어 놓았다. UN이 납북된 사람과 기체의 반환을 위한 중재에 나섰고 미국은 소련을 움직여 북한에 압력을 가 하게하여 결국 납북 한 한달 후 납북 자들을 돌려 보내 주었다. 그러나 창랑호 비행기는 UN군 측이 한 1년 동안 반환을 요구했으나 북한은 그 비행기가 자기 것인 양 반환 하지 안았으므로 그 이상 추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KNA만 손실을 보고 아직까지도 창랑호 기체 반환이나 그 비행기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한국 정부나 UN 등은 사람이 대개 다 송환 됨으로 그것에 만족하고 비행기 반환을 그 이상 추구 하지 않았다. 신용욱과 KNA도 사람이 송환 되어 안심하고 만족했다. 그러나 사실 비행기를 잃어 버린 것은 큰 타격 이었다. 더 큰 타격은 영국의 로이드 보험회사가 사고나 추락으로 비행기를 잃어 버린 것이 아니고 정치적으로 납치되어 그대로 비행기가 북한에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기체에 대한 보험 보상금 지불을 일체 거부하여 한 푼도 보상을 받지 못한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신용욱과 KNA는 창랑호 납북으로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큰 타격을 받게 되고 KNA의 쇠퇴는 이로 인해 시작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첫 번째 문제는 창랑호 납북 사건 후 KNA 탑승자가 급격히 줄은 것이었다. 신용욱 과 KNA는 다시 한번 이 큰 위기를 극복 하려고 최선을 다하였다. 

그 옛날 1930년대에 자신이 비행기 속에서 결혼한 것 같이, 그 해 여름 추풍령 상공 KNA 4발 여객기 내에서 공군장교의 공중결혼 식을 거행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신용욱사장이 주례를 하고 신랑과 신부가 웨딩마치로 비행기 엔진소리에 발 맞추어 47명의 승객하객의 박수를 받으며 입장하고 당시 미스코리아가 스튜어디스 차림으로 등장하여 꿈속에서 오색 무지개의 하늘을 나르는 동화처럼 구름 위를 나르는 비행기 속에서 백년해로의 가약을 맺는 “행복의 벨트”를 매어주어 승객하객으로부터 축하를 받았다. 공군장교다운 결혼이었다. 

또 당시 유명한 코메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도 KNA직원인 신부와 비행기에서 공중결혼을 했다. 이러한 이벤트가 장안의 화제가 되고 신용욱 사장과 KNA에게 반가운 격려는 되었지만 창랑호 납북이 후 큰 재정적인 문제를 극복하기는 역 부족이었다.. 

 

5. 대한국민항공 KNA의 종연 (1961년)

KNA에게는 또 하나의 위기에 닦아 왔다. 1960년 4월 19일 학생의거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고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창랑호 사건 후 KNA 재정은 호전되지 않고 많은 개인 빛을 져가며 비행기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4.19 정권교체로 상황이 더 악화 되었다. 신용욱 사장은 종로 일번지의 KNA 사옥은 물론 자신 거의 모든 부동산을 담보로 넣어도 은행에서 운영자금 융자를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서을-홍콩 선을 휴항 하고 국내선도 줄여가며 운영했다. 

이 와중에 1960년 6월 한국.영국항공협정이 체결되자 새로운 희망을 갖고 서울-홍콩 선을 재 취항시켰으며 국내선 운행도 증편하며 다시 한번 도전했다.

이 무렵에 한진상사 조중훈사장이 한국항공 (Air Korea) 설립하고 적극적인 사업은 펼치지 않았지만 항공운항사업 면허를 받았다.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장덕창씨도 고려항공을 열었다. 그 당시의 신용욱사장의 목표는 자유당시대에 가능하지 않았던 일본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통한 황금노선이라고 불리는 서울-도쿄간의 노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하에 신용욱은 조중훈의 합작제의를 받는다. 허나 신용욱은 장덕창 과의 합작을 논의하고 있었다.  

1960년 9월에 신용욱은 서울-도쿄간의 정기항로 개설에 대한 계획서를 한국정부에 제출하고 일본정부와 일본항공과 교섭하여 한.일 항공협정을 조속한 시일 내에 체결하고 양국간에 정기항로를 개설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또 하나의 엄청난 시련이 닦아 왔다. 이번에는 운이 신용욱 비행사의 항공의 꿈을 끝까지 도와 주지 않았다. 1961년 5월15일 저녁까지만 해도 신용욱은 운성이라는 요정에서 고려항공 장덕창과 한.일 항공협정을 앞두고 합작을 논의하고 있었다. 그 다음 날 5월16일 박정희 장군의 쿠테타가 일어 날 줄이야!!

5.16 쿠테타로 정권이 바뀌고 신용욱은 국회의원 2,3대를 지낸 항공사 사장으로 부정축재의 심사 케이스가 되고 서대문 형무소에 갇힌다. 박정희는 직접 신용욱에게 1953년 이승만 정권 때 정부를 통해 융자 받은 백만 불을 갚으라고 했다. 그 백만 불 정부보증융자는 30년 상환 조건으로 KNA를 위하여 빌렸고 그때까지 16만 6천불을 갚은 것이 입증되어 신용욱은 40일 후 무죄로 풀려 나왔다. 그러나 그가 비어있던 40 일 사이에 그가 서울-도쿄간 운행을 포함한 여러 계획으로 어떻게 던지 살려 보려던 KNA 는 재정적으로 더 악화되었다. 이미 직원들의 봉급도 지불할 능력이 없었다. 더 이상 사채를 얻을 수도 없었다.

신용욱은 참으로 하늘을 사랑한 사람, 비행기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의 라이트 형제 였고, 찰스 린드버그 였다. 그에게 불행했던 것은 한국의 가난이었고 역사의 수난이었다. 시기가 맞지 않았다. 가난한 나라, 그의 유년시절의 나르는 꿈은 결국 시대에 과분한 아주 처절한 비싼 꿈으로 현실화되고 있었다. 애통하게도 그는 출감 후 한 일주일 후 1961년 8월 28일 여의도 샛강에서 시신으로 나타났다. 한국 민간항공의 개척자로 한국 비행역사를 만들며 살아온 故 신용욱 KNA사장 비행사는 1961일 9월 2일 한국 실업인 장으로 만민이 애도하는 가운데 치러 졌다. 

신용욱의 부인 최정순은 남편의 일생이 담겨있는 KNA회사라도 살리기 위해 마지막 희망을 품고 미국의 팬암 (Pan Am) 이사로 있는 전 한국 UN 사령관 벤후리트장군을 뉴욕으로 찾아가 팬암이 KNA의 부채를 안고 합작회사를 만들어 줄 것을 간청했으나 실패했다. 그 이상 희망은 없었다. 

 

6. KNA후: 세계적으로 발전하는 차세대 한국민간항공 역사 시작.  

신용욱 사장의 비사 후 실제 故 신용욱의 KNA에 남은 것은 지난 10년 동안 태평양을 날랐던 것과 서울-홍콩의 정기항로, 국내선, 그리고 40여 외국항공 회사와의 국제계약 또는 항공협정을 맺어 항로를 개척한 무형의 자산뿐이었다. 

부인 최정순의 마지막 노력 후 KNA는 박정희 정권의 최고회의에서 보낸 감독관, 군인들 과 긴급자금 투입에 의하여 계속 운행은 되었으나 매월 많은 운행 적자가 쌓여가고 있었다. 

해결책으로KNA의 항공사업면허를 취소시키고 정식으로 1962년 6월 공군 예비역 장군 신유협을 초대 사장으로 100% 정부 출자의 국책항공회사를 설립했다. 이 국영공사도 계속 큰 적자를 면치 못하고 1967년 10월 장성환이 제2대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공개입찰에 부쳐 공매처분 하려고 하였다. 두 번의 유찰 후 박정희 정부는 1969년 한진의 조중훈에게 이 국책회사를 넘겨주었다. 이로서 대한항공 Korean Air 의 시대가 시작 되었다.

한국의 비행역사 그 자체인 신용욱 비행사 일대기를 돌이켜 보면 그가 일생을 통해 쌓아온 그의 혼이 담긴 한국의 국내/외 민간항공의 기반이 차세대 항공사 대한항공 (Korean Air), 아시아나 (Asiana) 등이 한국을 세계적인 민간항공의 나라로 발전시켜가는 기틀을 마련 해주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찬란한 항공역사를 만들어 가는 후세인 들은 한국민간항공 개척자 신용욱 비행사를 감사하게 또한 자랑스럽게 여기며 기리 기억해야 할 것 이다.  

2011년 6월 15일

 

*이 문서는 본 저자 민제홍박사가 그의 사랑하는 아내 신용욱 비행사의 딸 신미봉 생전의 염원을 생각하며 또한 그의 자식 민자영 과 민동유 의 향후 참고를 위하여, 전 미국 워싱턴 대학교수/ 현 워싱턴기반 시인/저자인 최연홍박사의 출간되지 않은 170+ 페이지 문서, “신용욱 비행사 일대기”, 와 1999년 한국항공대학교에 의해 출판된 송석우의 “노고지리의 증언” 으로부터 개작한 신용욱 비행사의 요약 일대기 이다. 


 

🙂

< end >

Richard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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